사랑스러운 나의 도시 #1-4. 타이페이 넷째 날, 그리고 처음의 그 끝.

타이페이 첫째 날

타이페이 둘째 날

타이페이 셋째 날

역시 글쓰기는 미루면 안된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넷째 날

넷째 날은 국립국부기념관1(25.04078879331904, 121.56202618676458)과 101타워2(25.03554776247256, 121.564297909543)를 방문했다.

첫 포스트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무작정 비행기 표 한장과 카메라 하나 들고 비행기를 탔었기에 아무런 정보가 없던 터. 첫 날 숙소에서 마주쳤던 외국인이 이야기 했던 101타워가 생각나 지도를 바라보면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101타워 북서쪽에는 국립국부기념관이 있었기에 101타워를 향하던 중 기념관을 들를 수 있었고 근위병 교대식을 기다렸다 교대식을 한번 더 볼 수 있었다.

장제스 기념관의 근위병 교대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1타워, One-o-one 타워라고 많이 불리우는 듯 하다. 국부 기념관 동쪽으로는 타이페이 시청이 있다.


멀리(?) 보이는 101타워. 정확한 이름은 타이페이101 (타이페이 금융센터)이다. 두바이에 부르즈칼리파카 세워지기 전까지는 말리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뒤이어 약 7년간 세계 최 고층 마천루로 그 위용을 뽐냈었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높고 유명한 건물이라 하여 들렀지 그리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돌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중요한 것 하나

전망대 89층을 둘러보고 88층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92층에 메달려있는 저 크고 아름다운 쇳덩어리. 건물의 높이가 워낙 높다보니 외부 영향(바람 등)으로 부터의 건물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두께 12.5cm 원반 41장을 붙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무게가 무려 660t. 건물의 흔들림을 방지 한다고 무작정 흔들리게 둘 수 없으니 댐퍼와 여러 구조물들이 이를 적당히 고정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101층 높이에 660t 짜리 쇠공이라니… 대단하다.

외부 전망대로 올라가면 사진과 같이 타이페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처음의 그 끝

계획도, 예산도 없이 시작한 여행이라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야 있나 무언가 기념이 될 것을 찾기 위해 현지인 친구에 물었다. 차(茶)를 사가라 한다.

뜨거운 해 아래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돌아오는 과정이야 뭐 출발의 역 순.

여행기랍시고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쉽지 않다. 여러 번 이야기 했듯, 계획도 없었고, 사전 조사도 없었고,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입국 시 머물 곳에 대한 정보를 제출해야 한다는 얘기를 출발 당일 알고 부랴부랴 하룻밤 숙박 예약을 했으니 무슨 말을 더 하랴.

남들 다 다녀왔다는 고양이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고궁 박물관도 들르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남들 다 보고, 들을 것 듣고, 먹을 것 먹는 여행으로써는 0점인 셈이다.
거기다 6년 전에 다녀왔던 여행의 여행기를 쓰고 앉아있으니…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고 10년이 더 지나도 한 가지는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첫 날 처음 출국장을 통과할 때의 그 기분, 그리고 처음 타오위안 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 기분, 처음 타본 낯선 나라의 지하철 풍경들.
마치 놀이공원에 엄마를 잃고 혼자 남겨진 8살 아이가 됐던 듯 한 그 기분 말이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설레는 기분.
특별한 여행지였기 때문이 아닌 처음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그 기분.

여행기로써는 부족하고, 별다른 정보가 없는 쓸 데 없는 긴 글이었지만, 만약 이 글을 당신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꼭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어디든 좋으니 계획 따위는 머리 속에서 지우고 떠나보라고.
놀이공원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의 마음과 같은 홀로 됨을 다시 한번 느껴보라고.

사랑스러운 나의 도시 #1-3. 타이페이 셋째날

타이페이 첫째날

타이페이 둘째날

타이페이 넷째 날, 그리고 처음의 그 끝

생에 첫 여행에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대화를 해서 만난 첫 친구 리우. 아침도 먹을 겸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1104 대만 Taipei City, Zhongshan District, Lane 137, Section 2, Zhongshan North Road, 29號1樓 보통 샤오룽바오2小籠包/小笼包 (Xiǎo lóng bāo, 샤오룽빠오)는 돼지고기를 넣는데 여기는 소고기를 넣는 특별한 곳이라고 한다. 사실 여기에 오기 전에 샤오룽바오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몰랐다.

베어물면 짭쪼름한 육즙이 가득하다.
보통 우리가 먹는 만두와는 다르게 안에 야채는 많지 않고 고기 중심의 속.
만두의 식감을 살리는 무 말랭이가 없다보니 식감은 좀 심심하지만 쫀득한 고기가 일품이다.

아버지를 보러 왔다더니, 아버지란 사람은 인사하고 우리 음식 주문하는걸 보더니 휙 사라져버렸다. 계산도 해줬더라. 고마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리우와 헤어져 거리를 나오니 승려들이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동쪽으로 큰 길을 따라 걷다보니 만난 행천궁(行天宮(Xingtian Temple). 관우신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한다. 대기 오염 감소를 위해 향을 피우거나 돈을 태우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울러 공덕함(일종의 헌금함)도 설치하지 않으며 짐승으로 제사를 올리지도 않고 금패를 받지도 않는 등 대외적인 모금과 상업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한다.
사원 내에 바닥에 증기가 나오는 장치들이 있다. 향냄새는 없고 대신 증기로 인해 나름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엔 다시 남쪽으로 이동. (대충 타이페이역을 중심으로 빙빙 돌았던거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장제스 기념관, Chiang Kai-shek3장제스(중국어: 蔣介石, 병음: Jiǎng Jièshí,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또는 창카이섹(광둥어: Zoeng Gaai-Sek, 영어: Chiang Kai-shek)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군사 지도자이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 3대 총통(1925년 ~ 1975년)이었다. 제스는 자(字)이며 흔히 불린다. 본명은 장중정(중국어: 蔣中正, 병음: Jiǎng Zhōngzhèng). 아명은 루이위안(瑞元), 족보명은 저우타이(周泰), 학명은 즈칭(志淸)으로 종교는 감리교이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화민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 중 하나다. 꼭 찾아보고 기억하자.)에 닿을 수 있었다.
국가 도서관 길 건너편으로 서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자유광장 아치에서 중정기념당을 바라보면 왼쪽(복쪽)으로 국가표연예술센터, 오른쪽(남쪽)으로 국가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들이 큼직큼직하게 지어져있다.


처음부터 타이페이의 어디에 뭐가 있는지 유명한 것은 무엇인지 따위는 1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걷기만 했는데, 아마 운이 좋았던게다. 때마침 중정 기념당의 근위병 교대식에 가까운 시각이었고 근위병 교대식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1시간 간격으로 교대식을 진행한다는 것 같다.

교대식은 약 10분 가량 진행된다.

다시 북서쪽 타이페이 중앙역쪽으로 걷다보면 중화민국 총통부(中華民國總統府, President Hall)를 만날 수 있다.
멋모르고 정문에서 카메라를 들이밀면 총든 군인들에게 제지당한다.
길 건너 촬영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있으니 길 건너에서 촬영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을 수 있다.이 때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모두 한국과 같을거라 생각해서 카메라 들이미는데 용감했었다. 4대만의 경우 관공서 건물 촬영이 불법은 아니지만 UAE 같은 곳은 관공서는 모두 촬영 불가이므로 잘 알아보고 카메라를 들이밀도록 하자.

슬슬 해도 저물고 있고, 만나기로 했던 친구를 만나러 야시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대만으로 떠나기 전 일했던 회사의 파트너사에서 일했던 Neil이란 친구.
친구의 안내로 가게 된 라오허제 야시장.
지룽 강변에 위치한 야시장으로 다른 시장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절이 있다. 왜 대만의 모든 시장 근처에는 절이 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사실 야시장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빌기 위해 절에 가는 사람들이 공양을 위해 음식 등을 들고 가다보니 절을 중심을 시장이 생기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절과는 다르게 도시 곳곳에 절이 있고 절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람의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점점 화려해졌다.


사랑스러운 나의 도시 #1-2. 타이페이 둘째날

타이페이 첫째날

타이페이 셋째날

타이페이 넷째 날, 그리고 처음의 그 끝

인생 첫 ‘나홀로’ ‘해외 여행’ 목적지 타이페이. 시작은 책 한권 분량의 경험을 가지고 돌아오겠노라 원대했으나 막상 그 원대한 꿈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나와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가득찬 이 도시는 오로지 두려움과 신선함 이 둘 말고는 내게 주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두려움보다 신선함이 더 컸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부랴부랴 숙소를 찾고 예약을 마쳤다. 둘째 날의 목표는 새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 다시 첫날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캐리어와 가방을 짊어지고 구글 지도를 따라 길을 걸었다. 큰 사고 없이 도착한 Bouti city capsule Inn. 이른 아침 움직인터라 아직은 체크인 전이었기에 짐을 맡겨두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기억은 잘 안나는 어느 식당에서 먹은 아침. 뭔가 밀가루 반죽을 튀긴 건데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또다시 시작된 무작정 걷기. 그렇게 거다 당도한 Wenchang Tepmle. 절이다. 그리고 절 앞은 시장이다. 한국과 다르게 도시 한가운데, 그리고 시장 안에 절이 있다. 또. 절 주위가 시장인건지, 시장 한가운데에 절인건지 아직은 모르겟다. 아무튼 한국인인 내게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야시장이 아닌 시장에서 무대포 여행초보인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나름의 고집이 있어 가능하면 가게에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미는건 자제하는편이니까. (덕분에 사진을 찍기 위해 쓸모 없는 지출도 하게 되고, ‘더’ 많이 먹게 된다.) 뭔가 관광지 스러운 곳을 찾아보자.

그렇게 도착한 곳은 대만 국립박물관의 Land Bank Exhibition Hall.
(아마 과거 은행으로 쓰였던 건물이었다고 하더라)

국립 대만 박물관에 속한 은행 정시관이 있으니 근처에 국립 대만 박물관도 분명히 있을 터, 그렇다 길을 하나 건너면 얼얼바 평화 기념공원 (228 peace monument), 그 가운데 국립 대만 박물관이 있다.

그렇게 공원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니 시간 잘지키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 배는 점심 시간을 알렸고 대만에서의 첫 ‘밥’을 먹었다.

이런 종류의 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기에 한군데 들어가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나와 현지인에게 물어봤더니 이건 홍콩 음식이지 대만풍 음식은 아니란다. (대만에서의 첫 식사가 홍콩풍 음식이라니..)

다시 발을 떼어 마주친 한 건물. 정확한 이름과 용도는 기억이 안나고, 정부? 지자체?의 한 건물이었다. 월요일인가는 관광도 가능 했던 곳. 아쉽지만 입장 가능일은 아니었던터라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하루 종일 걷는 것은 힘들더라.. 숙소로 돌아와 대충 씻고 젖은 수건 따위를 정리하는데 한 방을 쓰게 된 누군가가 들어왔다. 라커를 못 열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대화를 하다보니 이게 무슨일인가! 한국인이었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내 나라 사람을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서로 이름은 무어네, 나이는 몇이네 어디서 일하네 반가움을 마구 내뱉는 사이 또 한명이 들어왔다. 이번엔 타이중에서 온 대만인이었다. 나이는 대충 (당시에) 29정도 였던 듯.
사내놈들이 모이면 늘 그렇다. 서로 내가 잘났네 자랑도 좀 하고, 여자 이야기도 좀 하다가 결국 술 이야기. 타이중에서 온 친구가 자신의 고향에 한국의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가 유명하다 했다. 맛있는 술이 있다는데 짧은 영어가 대수랴 고향을 떠나온 사내 셋은 밤 열한시에 길을 나섰다.
(이것도 역시나 무식하기에 가능 했던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만은 안전한 나라이긴 하지만 타국 땅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그것도 밤 열한시에 술을 찾아 길을 나서다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그 술을 찾을 수 없었고 한시간을 헤맨 끝에 눈에 들어온 펍에 들어갔고 맥주만 마시고 돌아와야 했었다.